고려대 경영대 재학생 김예슬의 자퇴선언서
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. G세대로 '빛나거나'
88만원 세대로 '빚내거나',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
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. 무언가 잘못된 것
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
하는 20대. 그 한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
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..
명문대 입학은 '끝없는 트랙'의 첫 관문
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. 25년 동안 긴
트랙을 질주해왔다.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
기뻐하면서.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
해하면서. 그렇게 '명문대 입학'이라는 첫 관문
을 통과했다. 그런데 이상하다. 더 거세게 채찍
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.
지금 나는 멈춰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. 저
끝에는 무엇이 있을까? '취업'이라는 두 번째 관문
을 통과시켜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. 다시 새로
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.
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. 내가 달리는 곳이 끝이
없는 트랙임을.
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. 이름만 남
은 '자격증 장사 브로커'가 된 대학, 그것이 이 시대
대학의 진실이다. 국가는 의무교육의 이름으로
대학의 하청업체가 되고,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
'인간제품'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업체가
되었다.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
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.
이 변화가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
낡아 버려지는 우리는 또 대학원에, 유학에 돌입
한다. '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'
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
되어버렸다.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
할 수 있는가?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
수 있는가?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
그 앞에 무릎 꿇린다.
생각할 틈도,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
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. 교육이 문제다, 대학
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
게 이렇게 말한다. "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'룰러'
가 되어라." "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. 나는 너를
응원한다." "너희의 권리를 주장해. 짱돌이라도
들고 나서!"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,
"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".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
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.
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'대학'(大學) 없는
대학에서, 우리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
않는 '적자 세대'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. 젊은
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. 스
무 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.
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한
우리 젊음이 서글프다.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,
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
묻는다. 동시에 이 체제를 떠받쳐온 내 작은 탓을 묻는다.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 하나가 졸업
장 인생인 나,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.
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. 아니,
거부한다.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
시들어버리기 전에. 쓸모 있는 상품으로 '간택'되지
않는 인간의 길을 '선택'하기 위해. 이제 나에게는
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
더 필요하다.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
것이고 상처받을 것이다.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
에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.
생각한 대로 말하고, 말한 대로 행동하고, 행동한
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.
돌멩이 하나 빠져도 끄떡없다 하겠지만..
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
돌멩이 하나가 빠진다. 탑은 끄떡없을 것이다.
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됐다. 동시에 대학을
버리고 진정한 '대학생'(大學生)의 첫발을 내디딘
한 인간이 태어난다.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. "그래, 누가
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."
김예슬
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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